[인터뷰]
이제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
2009년부터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 발표
친밀한 관계 내 여성살해 정부 공식 통계 필요
가정폭력처벌법 개정해 다양한 친밀한 관계 포괄해야

181명.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조사된 여성의 숫자다. 이 숫자는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374명)까지 포함하면 555명으로 올라간다. 최소 15.8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는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취합해 분석한 결과로, 보도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실제로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여성의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여성의전화는 2009년부터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이 같은 통계를 담은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를 발표해오고 있다.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 작성에 참여하고 있는 이제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정부의 공식 통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정폭력처벌법 전면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음은 이제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와 일문일답.
- 한국여성의전화가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09년부터 매년 작성해 올해로 보고서를 작성한지 16년째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함이고, 또 다른 이유는 정책적인 기초가 돼야 하는 정부의 통계가 부재해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함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를 비롯한 국제 사회도 한국에 공식적인 통계 발표를 촉구하고 있다.”
- 보고서는 어떤 방식으로 작성되고 있나.
“보고서 작성 참여 인원은 매년 다르다. 올해는 43분이 함께해 주셨다. 먼저 크롤링으로 기사 원데이터를 수집한다. 그 뒤 여성폭력과 관련된 기사인지, 중복된 기사는 없는지 걸러내는 수작업을 이어간다. 이후 분석용 시트에 데이터를 기입하고 결측값이 없는지 다시 검토하며 정리·분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고서가 나오게 된다. 대게 12월 자원활동가를 모집, 연초부터 작업에 착수해 세계여성의날인 3월 8일에 맞춰 보고서를 발간한다. 작업량이 많은 데서 오는 어려움도 있지만, 여성살해 및 폭력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계속 접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다.”
-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느낀 문제의식이 있다면.
“친밀한 관계에서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181명이며, 살인 미수로부터 살아남은 여성까지 포함한 숫자는 555명이다. 2023년에는 19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친밀한 파트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다면 지난해에는 15.8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한 위험에 처했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만 분석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이전보다 언론에서 더 많이 보도된 탓에 그 숫자가 늘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여성살해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문제의식이 커졌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여성살해 사건이 많다는 것과 1년 사이 이 숫자가 23.6% 증가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여기에 국가 통계가 발표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 여성가족부는 여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따라 여가부가 여성폭력 실태조사를 작성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발표된 자료를 보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실태조사 결과를 조합한 것에 불과하다. 경찰청도 부부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 대상 폭력과 관련된 범죄 통계를 발표하겠다 한 뒤 자료를 내놓았다. 하지만 성별 정보가 비공개돼 있었다. 여성살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발표한 통계인지 의문이 들었다. 여성혐오 범죄, 여성살해 등에 대해 문제의식과 맥락을 담은 통계는 여전히 부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 현장에서 교제폭력 피해자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호소하는가.
“복합적인 피해들을 호소한다. 전국 여성의전화 상담 건수를 분석해 보면, 전·현 배우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 피해 중 과반에서 폭력이 동반됐다. 유형별로 분석했을 때 신체적인 폭력과 성적, 정서적, 경제적인 폭력 등이 중첩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폭력이 발생한 이후 피해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크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수사기관으로부터 제대로 된 협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2차 피해는 수사기관 외에도 가해자의 가족, 주변인에 의해 발생한다. 또한 법원이나 직장에서도 2차 피해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를 쌍방폭력으로 고소하거나 스토킹하는 일도 벌어진다. 역고소를 당할 경우, 너무 두려운 나머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 현장에서 피해자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난관은 무엇인가.
“먼저 지원정책의 경우 현재 쉼터를 중심으로 피해자 정책이 마련돼 있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분리된다. 쉼터는 가해자가 모르는 비밀 장소에서 운영되다 보니 피해자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결국 피해자가 자신의 일상을 바꿔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직장생활, 학업 등을 잠시 멈추고 일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또 상담소를 통해 받을 수 없는 지원도 있다. 이사비용, 자립지원 등은 상담소를 통해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관련 법안이) 부재한 것도 큰 문제다. 최근 몇 년 간 여성살해 사건이 계속해서 보도되면서 입법과 개정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우선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교제폭력과 데이트폭력의 어감이 다른 것처럼 법안으로 만들기 전 이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저희는 별도의 입법보다는 현존하는 가정폭력처벌법을 개정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친밀한 관계를 포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가정폭력처벌법의 문제는 ‘목적조항’(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이 목적조항으로 인해 가해자를 실질적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무력화된 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법을 전면 개정해 목적조항을 바꾸고, 친밀한 관계의 범위를 넓게 정의해야 한다.”
- 친밀한 관계는 어떻게 정의해야 한다고 보는가.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현재는 혼인, 혈연, 입양 중심으로 정의되고 있다. ‘기타에 준하는 관계 등’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해외의 경우, 호주는 로맨틱하고 친밀한 관계를 (교제관계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데이트했거나 혼인했던 관계가 포함되며, 동성은 물론 LGBTQ도 포함된다. 영국의 가정폭력방지법은 가정폭력을 16세 이상의 개인적인 관계(personally connected)를 맺은 개인들 간의 행위가 폭력적이었을 때로 정의한다. 우리의 맥락에 맞게 피해자들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의 정의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전에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당신의 느낌을 믿어요’라는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피해자분들께 다시 한번 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느낌을 믿고 피해자분들이 목소리를 냈을 때, 이를 잘 들어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